일본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어서 한국의 형제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고조선시대때 한국과 동맹을 맺고 중국의 침입에 대항하기도 하였고 1950년 6.25전쟁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수많은 터키군사들이 한국땅에서 죽었습니다
그 이후로 터키는 한국을 칸카르데쉬 즉 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불러서 터키는 한국의 형제의 나라라고 합니다
몽골은 역사적으로 중국에게는 나쁜짓을 하였지만 몽골황제가 고려만은 특별대우를 하라는 명을 내려서 그런지 우호적으로 호의적으로 잘해주어서 지금도 몽골사람들이 한국을 슬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터키와 몽골은 한국의 형제의 나라라고 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게는 악감정이 있지만 몽골에게는 악감정이 없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에 한국을 몽골의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을 힘들게 했지만 몽골은 한국에게는 역사적으로 우호적으로 즉 호의적으로 잘해주었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국과 일본과 북한과는 부정적이고 비호감적이지만 몽골만큼은 우호적이고 호의적입니다
그래서 이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조상님들은 중국과 일본과 멀리하고 몽골과 역사를 같이하고 서역과 중앙아시아와 접촉을 했었어야 했고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는 일본에게 역사적으로 도움을 주지말았어야 했고 백제는 일본에게 역사적으로 도움을 주지말았어야 했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내용에 연오랑과 세오녀와 천일창과 그의아내를 일본으로 보내는 내용을 적지 말았어야 했고 한국의 모든조상님들은 일본에 가지말았어야 했고 고구려는 몽골과 카자흐스탄을 거처 유럽으로 진출을 했었어야 했고 백제와 신라와 가야는 페르디난도 마젤란처럼 세계일주를 했었어야 했었습니다
그래야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려서 중국과 일본보다 더 빨리 전세계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알아줄수 있는 계기를 가져올수 있었을것입니다
굳이 중국과 일본을 멀리하고 터키와 몽골과 서역과 중앙아시아와 역사를 같이 하였더라면 한국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렸을것이었을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을 버리고 서양과 터키와 몽골과 서역과 중앙아시아와 역사를 같이 하였더라면 한국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렸을것이고 미국과도 친하게 지낼수 있었을것이었을것이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말씀을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최고의 답변🔥🔥🔥

1960년 동아일보는 신응균 튀르키예 대사의 말을 인용하며, 튀르키예인이 대한민국을 "칸 카루다슈 코리아"(피로 맺어진 형제, 한국)라 부른다고 보도하였다.[3][4] 한국전쟁은 튀르키예가 해외 파병을 한 첫 사례이고, 참전을 계기로 튀르키예인이 지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국민정서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4] 197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튀르키예 의원단이,[5] 1982년에는 대통령 케난 에브렌이 방한했을 때에도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으로 친밀감을 표현함에 따라,[6] 해당 표현이 두루 알려지게 계기가 되었다.[4] 1989년에는 김재순 국회의장이 에브렌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두 국가가 혈맹이자 동족이라는 인식을 보여줬으며,[7]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 두 국가가 맞붙은 나라이다.

군사[편집]

한국전쟁의 튀르키예군 참전용사.

1950년 10월 17일, 튀르키예 제1여단 5400여명 병력이 여단장 타신 야스지 준장의 지휘 아래 부산항에 상륙해, 곧장 전장에 투입되어 평양 탈환 작전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튀르키예군은 북두칠성을 방향 삼아 북으로 북으로 진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일곱별을 수놓은 부대 마크를 갖게 되었다. 휴전되기까지 3년 동안 튀르키예군은 군우리(軍隅里) 베가스 고지, 군포(軍浦) 등 곳곳에서 유엔 깃발 아래 용감히 싸웠다. 튀르키예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사를 파견하였다. 튀르키예 제1여단 5천4백명이 부산항에 1950년 10월 17일에 상륙하였으며 바로 평양 탈환 작전의 전선에서 싸웠다.

특히 군우리 전투는 튀르키예군의 격전이었다. 1950년 11월 28일 새벽 평양 북쪽 군우리에서 평양을 탈환하였으며 한국전쟁에서 튀르키예군은 많은 사상자가 있었다. 전사 717명, 포로 229명, 전상 5247명, 실종 167명을 기록했다. 이 같은 피해는 참전 유엔군 가운데 미군 다음으로 컸다. 휴전 후에도 튀르키예 부대 1개 여단 병력이 계속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에 주둔, 서부 휴전선을 지켜왔다.

1960년 7월 튀르키예 군사혁명 정부 결정에 따라 1개 중대 병력으로 감축, 미군 제2사단 38연대 2대대에 배속되었다. 1966년 7월 7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 자리잡은 주한 튀르키예군 제16중대는 16년에 걸친 한국 주둔을 마감하였다. 1966년 7월 유엔군 산하 튀르키예 중대를 철수시켰다. 16년 동안 10개 여단 6개 중대가 교체 근무하기까지 한국을 다녀간 튀르키예군은 모두 6만여명이다.[8]

질문과 답변을 친구들과 공유하세요.